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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댁 서재/글방

불과 꽃, 그리고 바람


그날, 이렇게만 내려줬어도... 거실창 앞에서 봄비를 향해 혼잣말을 했다. 환기를 하려다 말고 서둘러 창을 닫았다. 빗물을 머금은 재들이 뿜는 냄새는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집안까지 몰려들어왔다. 영랑호를 시뻘겋게 불태웠던 화마의 악몽이 떠올랐다.


그날, 내가 서울에 가지만 않았어도 불이 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날, 북양양IC를 지나며 보았던 노을은 속초에서 본 중 가장 예쁜 빛깔이었다. 속초의 석양이 이렇게 붉었던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자마자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고성에 큰 불이 났어. 속초로 번지고 있어. 어서 피해. 하지만 난 집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집 근처까지 닿은 불은 시뻘건 혓바닥을 쉴새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새벽 2시, 몸을 가누기 힘들도록 불어대던 바람이 순식간에 뚝! 멈췄고 불길이 잡혔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날로부터 한 달여. 불에 그을은 벚나무는 이왕에 핀 꽃을 끝까지 피운 후 푸른 잎까지 무성히 내어준다. 검었던 잔디가 본래 색을 되찾고, 시커먼 삼나무는 반쪽이나마 푸르게 싹을 틔운다. 철쭉, 라일락, 아카시아, 그리고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소리없이 그날의 검댕이들을 지운다. 나뭇잎 하나없이 메마른 소나무들 사이로 푸르고 여린 알 수 없는 가지들이 고개를 내민다. 그들 사이로 살랑 바람이 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