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청에서 무료강좌를 한다고 해서 몇 일전에 신청을 하고 갔다. 평일 낮시간, 여성만을 위한 강좌. 이런 곳에 다닐 여유가 내게도 생겼다. 그런데 낯익은 풍경이 펼쳐진다.
"강좌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강좌 인사말을 하기 위해 구청장님께서 오시기로 하셨는데, 바쁜 일정이 있어서 못 오셨습니다. 강의 중간에라도 오시면 그때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강좌는 시작되었고 오랜만에 듣는 강좌여서 그런지 재미났다. 한참 푹 빠져 들여하는데, 강의장 문이 열리면서 강좌 책임자라는 공무원 아줌마가 뛰어 들어오고 단상을 옮기도 난리다. 구청장님이 드디어 오셨단다.
구청장님은 구.태.의.연.한 인사말을 주욱 늘여놓고, 너무 바뻐서 늦었다고 "미안하다"를 몇 번 외치고는 나갔다. 구청장 이야기는 아마도 누군가 써주거나 귀뜸해 준 것을 읽는 듯. 구청장도 오고 싶지는 않았을 듯. 강의의 맥은 끊겼고 강의장 아줌마들도 구청장 인사말에 딱히 관심은 없는 듯.
누구를 위한 인.사.말 이었을까? 구청장을 위한? 강좌생들을 위한? 이런 걸 보고 애블린 패러독스라고 하나?
그런데 이 광경이 참 낯익다. 불과 몇 년 전에 행사장에서 내가 했던 일이 이런 것들 아니었나. 그때 사장님이 도착했다느니 회장님이 도착했다느니 하면서 수선을 떨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강좌의 주인공은 수강생인데, 당시 내게 주인공은 사장님이고 회장님이었다.
주제 파악 못하고 살던 나의 과거다.
2.
하자센터 책방에 책 반납도 하고 DVD도 빌릴 겸 들렸다가 하자센터 옆에 있는 리모델링한 <아하! 청소년 성문화센터>에 들렀다. 조카들을 체험시키고 싶다는 언니의 말을 들었던 터여서 체험 일정같은 것을 알아보려고 들렀다. 리플릿을 뒤적이고 있는데, 누군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무슨 일로 오셨어요?" 한다. 그래서 대답을 했더니, 곧 센터 설명을 시작하니까 참여하란다. 난 복(福)도 많다.
말을 참 잘하는 사람이었다. 줄줄줄줄 블라블라블라블라 질문은 나중에 받는다면서 주절주절주절주절, 쉬지않고 말을 참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가 이미 말한 것을 질문하면 "아까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하면서 사람 면박을 준다. 우히히, 무섭다.
센터를 돌면서 설명을 하고는 다시 처음 설명을 했던 1층에 모두 모였다. 드디어 질문 시간. 이 사람이 이미 한 말을 질문하면 안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며 모두 질문을 한다. 이런 설명회를 많이해서 그런지 어떤 질문에도 척척 답을 한다. 여전히 무지 말을 잘 한다.
시계를 슬쩍 보았더니 6시가 거의 되려고 하고 있었다. 눈치없는 대학생들은 계속 질문을 하고 말 잘하는 설명자는 슬슬 이 설명회가 진력나는가 보다. "퇴근하셔야 겠네요." 하면서 내가 장내 정리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 설명자의 옆모습이 어른거렸다. '난 뭐든지 알고 있어. 이런 거는 수십번도 더 해봤다고.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생각 좀 하시지. 공부 좀 하고 오시지. 아! 힘들다 힘들어."하는 설명자의 잘난 척하는 모습이 낯익다.
이것 또한 주제파악 못하고 살던 내 과거 모습.
요즘은 다른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내 과거의 모습을 자주 발견한다. 대부분은 후회스러운 모습. 이제라도 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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